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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과 1987년, 대한민국에는 두 차례의 거대한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은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운 시민들의 피 땀과 눈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입니다. 억압과 희생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버리지 않은 시민들의 용기와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으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의 배경과 전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5.18 민주화 운동의 배경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며 이후 권력 공백이 발생하고, 이를 기회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은 1979년 12월 군내에서 추가 쿠데타를 주도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 군부는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 적용했으며, 이로 인해 대학과 언론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정치적 자유가 크게 억압되었고, 이는 특히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큰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정부의 독재적 통치와 인권 침해에 맞서 민주주의와 기본적인 인권을 요구하며 반정부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광주와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정부의 계엄령 확대와 군부의 통치에 대한 저항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광주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지역 중 하나로,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았던 곳이었습니다.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계획했으나,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광주와 전라남도의 시민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켰고, 이들의 반발은 곧 폭발적인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2. 사건의 전개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계엄령 확대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가 진행되었으나, 정부는 이를 통제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부는 이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특전사를 투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에 대한 무력 사용이 심각해졌고, 여러 명의 시민과 학생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강경 진압은 광주 전역의 분노를 촉발했고,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무기를 확보하고 자위대를 조직하여 맞섰습니다. 시위는 점차 격렬해져, 광주는 사실상 정부 권력에서 벗어난 독립된 지역처럼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군과 경찰에 맞서며 도시를 통제했고, 이틀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광주는 잠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좌시하지 않고, 광주를 완전히 고립시킨 후, 최후의 군사 작전을 통해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사망하고, 더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체포되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깊이 인식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많은 희생을 요구했지만, 이 운동은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동기를 부여하고,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6월 민주항쟁의 배경과 전개
1987년에 접어들면서,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로 노태우를 지명했습니다. 이는 노태우의 후보 등록과 전두환의 계속된 권력 유지 의도가 분명해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큰 분노와 실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1987년 6월 9일 서울대학교 학생인 박종철이 경찰 조사 중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과, 같은 해 4월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시위가 시작되었으며, 곧바로 노동자, 일반 시민, 지식인 등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습니다. 6월 10일에는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고, 이는 '6월 항쟁' 또는 '6월 민주항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시위는 전두환 정권의 즉각적인 하야와 직접 선거제 도입, 그리고 민주적 헌법 개정을 요구했습니다. 정부는 처음에는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시위의 규모와 강도가 점점 더 커지면서 진압만으로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위대가 경찰과의 충돌로 인해 부상을 입거나 체포되었으나, 시위는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적 저항 앞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1987년 7월 29일, 정부는 직접 선거제 도입을 포함한 민주화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그해 12월에는 직접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물론,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신군부 세력의 일부 권력 이양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나, 6월 민주항쟁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