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반응형

    서양 열강의 침략에 맞서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를 탄압했습니다. 이와 관련한 두 사건인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에 대해 살펴보고 이로 인해 세워진 척화비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

    1.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침입과 내부 혼란을 차단하기 위해 천주교를 엄격하게 박해했습니다. 19세기 중반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이는 전통적인 유교 사회의 가치와 충돌했고, 사회적,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습니다. 천주교는 당시 조선에서 천주교가 조상 제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유교의 핵심 가치에 어긋나기 때문에 배척되었습니다. 또한,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이 증가하며 흥선대원군은 이를 조선의 주권을 위협하는 외세의 세력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1866년,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 수천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투옥되었고, 조선 내 천주교 공동체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이 박해는 외교적 문제로도 이어졌습니다. 특히,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은 프랑스 정부의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켜 결국 병인양요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병인양요는 1866년 프랑스 해군이 조선을 침공한 사건으로, 프랑스가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프랑스는 처형된 선교사들의 복수와 천주교도들의 보호를 명분으로 이 침공을 정당화했습니다. 프랑스 해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여 한때 섬을 점령했으나, 조선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조선군과 민간인들은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며 강화도의 주요 요새를 지켜냈습니다. 결국 이 침공은 몇 주 지속된 후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프랑스군은 물자 부족과 조선군의 저항, 그리고 다가오는 겨울 날씨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인양요는 조선의 외교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위험을 실감하게 하며, 흥선대원군에게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할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2. 제너럴 셔먼호와 신미양요

    신미양요(1871년)는 조선과 미국 간의 첫 무력 충돌로, 미국 해군이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근처에서 조선인에 의해 불태워지면서 촉발되었습니다.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한 사과와 함께 미국 선원의 안전과 무역을 위한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이에 대한 응답을 거부하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며 외교적 접촉을 회피했습니다. 1871년, 미국은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 관계 수립을 시도하면서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미국 해군 대표단은 조선의 외교적 개방을 요구하며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했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대한 불만과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해군은 강화도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 해군은 1871년 6월, 약 650명의 해병과 5척의 전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했습니다. 강화도 해안의 조선 요새들은 미국 해병대와의 충돌에서 처음에는 강한 저항을 보였으나, 미국 군의 우월한 화력 앞에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군은 강화도의 여러 군사 요새를 점령하고 포로를 취하는 등 일시적인 군사적 우위를 확보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압박에 크게 당황했으며, 조선군의 저항이 계속되자 미국은 추가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하며 압력을 높였습니다. 3일간의 교전 결과 조선은 광성보가 함락되고 어재연 장군 등 수비 병력 대다수가 사망하였습니다. 미해군은 20일간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하였으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신미양요에서 미군이 승리하였으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양선을 몰아낸 사건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습니다.

     

    3. 척화비의 의미와 영향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외세를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868년과 1871년에 걸쳐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라는 명을 내렸고, 이는 외국인과 그들의 영향을 배척하는 공식적인 정책의 일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척화비는 외국 문화와 영향에 대한 반대를 명시적으로 표현한 비석입니다. 비석에는 외래문화를 배척하고, 외국 세력의 침입에 맞서 조선의 전통적 가치와 순수성을 지키자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석들은 주로 접경 지역이나 주요 도로변, 항구 근처에 설치되어 외국인과의 접촉을 경계하는 경고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흥선대원군의 국정 철학과 정치적 의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척화비의 설치는 단기적으로는 외국 문화와의 접촉을 억제하는 효과를 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의 근대화와 개방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국제 사회의 변화와 흐름에서 점차 고립되어 갔고, 결국 19세기말 강화도 조약 등을 통해 서양 열강의 강제 개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응형